“가축들도 속일 수 없거늘 사람이 진짜와 가짜에 현혹돼 헛되이 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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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들도 속일 수 없거늘 사람이 진짜와 가짜에 현혹돼 헛되이 떠든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4.19 09: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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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⑪…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①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⑪…관조(觀照)와 경계(境界)와 사이(際)의 미학①

[한정주=역사평론가] 여기에서는 상당히 철학적인 화법과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 듯싶다. 따라서 필자의 견해는 상당한 논란을 불러올 수도 있고 어떤 독자는 필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상관없다. 필자는 필자의 견해를 밝힐 뿐 그에 대한 동의 여부는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먼저 오늘날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하나의 명제, 즉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에서부터 얘기를 풀어나가 보자. 왜냐하면 이 명제는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의 결합이 초래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자명한(?) 명제는 우리가 ‘보는 것’은 ‘아는 것’, 곧 지식과 경험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의 의문이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아는 것’, 즉 지식과 경험이 잘못되거나 왜곡되었다면 우리가 ‘보는 것’ 또한 잘못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우리는 어떤 것의 사실 혹은 진실 여부를 가릴 때 흔히 “내가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말을 입증의 결정적 근거로 제시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우리가 ‘본 것’이 ‘아는 것’에 지배당하고 ‘아는 것’이 잘못되거나 왜곡되었다면 ‘본 것’ 역시 거짓이거나 가짜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따라서 ‘본다는 것’은 진짜와 가짜, 실재와 허상, 사실과 거짓, 실체와 환상의 여부를 가늠하는 잣대나 척도가 결코 될 수 없다.

이러한 철학적 질문과 의문을 문학적·미학적 차원에서 본다면 대개 글을 쓰는 작자(作者)가 ‘본 것’을 언어와 문장으로 묘사하거나 표현할 때 그것의 실재와 실체 혹은 진짜와 사실 여부를 제대로 글로 옮겼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만약 작자(作者)가 ‘본 것’이 잘못되거나 왜곡된 지식과 경험, 즉 ‘아는 것’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면 그 글은 가짜와 허상 혹은 거짓과 환상일 수도 있지 않는가?

도대체 작자가 ‘보는 것’, 곧 세상만사와 자연 만물 등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글쓰기가 가능하기는 가능한 일일까?

18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 철학적·미학적 문제와 의문을 깊게 탐구했다. 글쓰기란 대부분의 경우 작자의 눈으로 본 사물과 대상을 생각으로 다듬고 마음으로 그려서 언어와 문장으로 묘사·표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본다는 것’의 문제를 깊이 천착한 대표적인 글이 이용휴의 ‘호설(虎說)’이다. 여기에서 이용휴는 그림이나 책을 통해 호랑이에 대해 ‘알고 있던 것’과 직접 눈으로 호랑이를 ‘보았던 것’의 괴리감을 얘기하면서 어질고 뛰어난 명성을 얻게 된 인물 가운데에도-이 호랑이처럼-직접 만나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세상사의 이치를 적고 있다.

이용휴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는 것’과 ‘보는 것’은 실체와 진실에 가깝기보다는 오히려 허상과 거짓에 가까운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또한 실물에 가까운 그림을 보고 놀라 벌벌 떨며 도망가 숨는 개에 빗대 도대체 “우리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갖고 있는 것일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호랑이는 깊은 산속에 살아서 사람들이 쉽게 보기 어렵다. 옛날 책에서 대개 말하기를 ‘호랑이의 씩씩하고 괴이함이 악귀와도 같다’고 했고 여러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건장하고 걸출한 사나운 호랑이의 모습만 부각시킨다. 나는 ‘세상에 어떻게 이처럼 울부짖는 기이한 동물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신유년(혜환 34세 때) 광주(廣州)에서는 사나운 호랑이 때문에 골치를 앓아 관에서 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 상을 주었다. 사냥꾼 아무개가 연거푸 호랑이 여러 마리를 죽이자 형님인 죽파공(竹坡公: 이광휴)이 그 소식을 듣고는 후한 값을 치르고 황화방(黃華坊: 현재의 정동) 집으로 가져오게 했다.

죽은 호랑이를 몇 리도 채 옮기기 전에 거리는 이미 인파로 가득차서 뿌연 먼지가 천지를 뒤덮었다. 호랑이가 이르자 문 쪽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모두 소름이 끼쳐 얼굴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렇게 해서 마당에 누워 있는 죽은 호랑이를 마음껏 보게 되었다.

그런데 큰 이빨과 갈고리 같은 발톱은 대개 맹금(猛禽)류와 같았으나 이전에 그림이나 책에서 보고 들은 것만은 못했다. 여기에서 어질고 뛰어난 인물로 책에 실려 있긴 하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한 사람 중에서 이 호랑이와 같은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듣기로 어떤 재상의 집에 보관된 새끼 밴 호랑이 그림은 진(晉)나라와 당(唐)나라 연간의 물건이라 전해진다. 그 그림의 괴이하고 사나움은 지금 세속에서 그리는 것에 못 미치는 것 같지만 개들이 그림을 보자마자 벌벌 떨며 도망가고 숨는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그림으로 시험해 보면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저 가축들도 속일 수 없는 것이거늘 사람이 도리어 진짜와 가짜에 현혹되어 헛되이 떠들기만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이용휴, 『혜환잡저』, ‘호설(虎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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