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은 천하를 속이는데 제 한 몸 편하고자 사람 속이는 사기는 시비거리도 아니다”
상태바
“임금은 천하를 속이는데 제 한 몸 편하고자 사람 속이는 사기는 시비거리도 아니다”
  • 한정주 기자
  • 승인 2017.02.17 15: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⑩…해학(諧謔)과 풍자(諷刺)의 미학⑨
▲ 신윤복의 ‘건곤일회도첩’ 중에서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철학]⑩…해학(諧謔)과 풍자(諷刺)의 미학⑨

[한정주=역사평론가] 저잣거리를 오고 가고 기생집을 드나들며 사람들을 속여 이득을 취하는 이홍(李泓)이라는 사기꾼의 이야기를 빌어 가장 큰 사기는 천하를 속이는 것이고, 그 다음은 임금이나 정승을 속이는 것이며, 그 다음은 백성을 속이는 일이라고 한 다음 천하를 속이는 자는 천하의 임금이 되고, 임금이나 정승을 속이는 자는 자기 몸을 영화롭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자는 집을 윤택하게 한다고 풍자한 이옥의 ‘이홍전(李泓轉)’은 글 솜씨 만큼이나 첨신(尖新)한 기운을 내뿜는 희작(戱作)이다.

사기꾼으로 가득 찬 세상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기꾼은 바로 천하를 속이는 임금이며, 자기 한 몸 편하고자 사람을 속이는 이홍의 사기는 시비할 거리도 못 된다는 촌철살인(寸鐵殺人) 같은 독설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이홍은 서울 사람이다. 풍채가 헌칠하고 얼굴도 잘 생긴 데다 말솜씨도 유창해서 처음 대하는 사람은 전혀 사기꾼인 줄 모른다.

이홍의 성격은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복과 음식을 좋아해서 겉보기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집이 가난하였다. 일찍이 이홍은 큰 가문의 거족(巨族)에 출입하면서 관개공사의 이로움을 말하였다. 마침내 거족에게 수만 냥의 돈을 얻어 내 청천강(淸川江)에서 공사를 벌였다.

그는 매일 소를 잡고 술을 거르고 이웃에 이름난 기생을 불렀는데, 이홍이 부르면 오지 않는 기생이 없었다. 유독 안주(安州)의 기생 한 명이 재주와 미모가 평안도의 으뜸으로 감사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그 기생은 아무리 별성행차라도 그 낯짝조차 엿볼 수가 없었지만 이홍도 그 기생만은 불러올 방법이 없었다.

이홍은 자신이 직접 안주로 가서 열흘 이내에 일을 성하고 돌아오기로 동무들과 내기를 했다. 그러고는 말에 짐을 싣고 비단 쾌자를 걸치고서 구종도 없이 갓 쓴 사람 하나만을 데리고 채찍을 울리며 안주 성내로 들어갔다.

사리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홍을 보고 누구나 ‘개성의 대상(大商)’으로 인정하였다. 이홍은 그 기생의 집을 찾아가서 숙소를 정했다. 기생의 아범은 군교(軍校)로 늙어서 주막을 낸 자였다.

이홍은 다음과 같이 약속을 하며 말했다. ‘내가 가진 것은 가진 물건이라네. 주막에 다른 손님은 받지 말게나. 내 이번 걸음에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데, 그 사람이 늦게 올지 금방 올지 예측할 수 없다네. 떠나는 날 모든 걸 청산함세. 내가 원래 입이 짧으니 아침과 저녁을 각별히 신경을 써서 차려 주게. 값이 많고 적음을 염려치 말고 연채는 주인 마음대로 정하시게나.’

기생 아범이 보니 사람은 장사치요, 싣고 온 짐은 가볍지 않고 묵직한 모양새가 대개 은돈인가 싶었다. ‘옳지, 좋은 손님이로구나.’ 그러고는 머무를 방을 깨끗하게 치워 이홍을 맞이했다.

이홍은 머무를 방에 들어가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잔뜩 상을 찌뿌리고 시종을 불렀다. ‘얼른 장지를 사 오너라. 사람이 단 하루를 묵더라도 이런 데 누워 있어서야 되겠느냐?’

시종이 방 안 도배를 말끔히 끝내자 이홍은 짐을 머리맡에 옮겨다 놓고 양털 요와 비단 이불을 깔았다. 그러고는 문을 닫아걸고 시종과 함께 계산을 했는데, 일이 종일토록 끝나지 않았다.

기생 아범이 문틈으로 귀 기울여 들으니 둘이서 비단이며 향료며 약재 등의 물품을 셈하는 것이 아닌가. 기생 아범이 자기 여편네인 퇴기(退妓)와 의논하였다. ‘저 손님은 거상이야. 저도 우리 아이를 보면 영락없이 반할 테지. 반하면 소득도 적지 않을 거야. 아무렴 감사님 덕에 비기겠나.’

이렇게 생각하고 딸을 평양 감영에서 살짝 불러왔다. ‘귀하신 어른이 누추한 곳에 오래 머물러 계시기로 젊은 주인이 감히 현신하옵니다.’ ‘이러지 말게. 여주인이 하필 이럴 것이 있겠나?’

이홍은 분주한 듯이 계속 주판알을 굴리면서 어린 기생을 안중에 두지 않은 듯 행동하였다. 기생 아범이 속으로 생각했다. ‘저 양반 대단한 거상이로구나. 안목이 워낙 높고 도도한 것을 보니 아마 재물이 많기 때문이렷다.’

그리고 저녁에 다시 조용히 말했다. ‘제 아이가 보시기에 누추하신지요? 손님께서 아주 냉담하시니 우리 아이가 지금 매우 무색한 모양입니다.’

이홍은 여러 차례 사양하고 별로 의향을 보이지 않다가 마지못해 응하는 듯했다. 기생은 안주상을 차리고 손님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추며 한껏 아양을 떤 뒤에야 겨우 동침할 수 있었다. 그 뒤 기생은 사나흘 동안에 틈틈이 손님과 만났다.

하루는 이홍이 눈썹을 찌푸리고 근심하는 기색으로 주인을 불러서 물었다. ‘최근 서도에 명화적이 안 났다던가?’ ‘없었지요.’ ‘의주에서 여기까지 며칠이면 오던가?’ ‘아마 며칠쯤 걸립죠.’ ‘그럼 날짜가 지났는걸. 말이 병이 났나?’ ‘손님, 무슨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북경에서 오는 물건이 며칟날 압록강을 건너 며칟날 여기 닿기로 약조하였다네. 그런데 여태 나타나지 않으니 걱정인걸.’

근심어린 얼굴로 이홍은 시종을 불러 말했다. ‘너 서문 밖으로 나가 보거라.’ 시종이 저녁 때 돌아와서 소식이 전혀 없다고 아뢰었다.

그 후 이홍은 근심으로 날을 보내더니 사흘째 되는 날 주인을 불러 말했다. ‘내가 지금 귀중한 재물을 가지고 있으므로 나가 보지 못한다네. 이제 자네는 나와 한 집안이나 다름없다네. 내 갑갑해서 병이 날 것 같아 도저히 앉아 기다릴 수 없구먼. 내 물건을 자네에게 맡길 터이니 잘 좀 간수해 주게. 내 나가서 알아보고 옴세.’

그러고는 머물고 있던 방을 잠근 다음 총총히 나갔다. 이홍은 바로 샛길로 빠져 청천강으로 돌아왔으니 과연 동무와 내기한 대로 전후 열흘이 걸렸다.

기생의 집에서는 손님이 영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이홍이 남기고 간 행장을 열어 보았다. 행장에는 거위알 만한 조약돌이 가득 들어 있었을 뿐이었다.

한 시골 아전이 군포를 바치러 돈 천여 꿰미를 가지고 상경하였다. 이홍이 여관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아전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꾐수를 썼다. ‘내게 한 가지 술수가 있소. 노자나 해웃값쯤은 벌 것이오.’

아전은 좋아하면서 가진 돈을 몽땅 이홍에게 맡겼다. 아전이 보니 이홍이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돈냥이나 버는 것 같았다. 십여 일이 지났다. 갑자기 이홍이 남산 경치가 좋다고 떠벌렸다. 그래서 술 한 병을 들고 아전을 앞세우고 팽남골(彭南洞)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올라갔다.

이홍이 혼자서 술 한 병을 다 마시더니 목을 놓아 우는 것이었다. ‘원, 술 한 병도 못 이기고 이러우?’ ‘서울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곳을 버려야 하다니 내 어찌 눈물이 나지 않겠소.’ 말을 마치자 이홍은 손매에서 줄 한 가닥을 꺼내 소나무 가지에 걸고 목을 매려 했다. 아전이 크게 놀라서 손으로 곡절을 물었다.

‘당신 때문이라우. 내가 어디 남의 돈 한 푼을 속일 사람이겠소. 남을 잘못 믿고 그만 당신 돈을 몽땅 떼이고 말았구려. 물어내자 하니 가난한 놈이 도리가 없고 그냥 두자니 당신이 성화같이 독촉할 것이나 죽느니만 못하니 말리지 마시오.’

이홍은 목을 매고 밑으로 뛰어내릴 기세였다. 이에 아전은 당황해서 발돋움을 하며 말했다. ‘죽지 말아요. 내 당신에게 돈에 대한 말은 않으리다.’ ‘아니야, 당신이 시방 내가 죽으려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게야. 말이야 무슨 문서가 되우. 나중 당신의 말을 무엇으로 막는단 말이오. 지금 아예 죽느니만 못하지.’

아전은 혼자 ‘저 사람이 죽으나 사나 돈 못 받기는 마찬가지고, 죽으면 또 뒷말이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분주히 주머니에서 붓과 먹을 꺼내 돈을 받았다는 증서를 써 주고 죽지 않도록 타일렀다.

‘당신이 정 이런다면야 내 하필 죽을 까닭이 없을 것 같소.’ 이홍은 옷을 훌훌 털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당장 그 아전을 몰아내고 대문 안에 들어서지도 못하게 하였다. 법관(法官)이 이 사실을 바람결에 듣고 이홍을 잡아다가 볼기 백 대를 갈겼다. 이홍은 거의 죽게 되었으나 아주 죽지는 않았다.

이홍의 집은 서대문 밖에 있었다. 어느 날 이홍은 꽃무늬 비단 창옷을 입고 왼손으로 만호 갓끈을 어루만지며 호박 선추를 굴리고 어슬렁어슬렁 남대문으로 들어섰다. 마침 남대문 앞에서 한 중이 권선을 하여 경쇠를 치며 시주를 구하는 중이었다.

이홍이 그 중을 불렀다. ‘스님, 예서 며칠이나 서 있었나요?’ ‘사흘 동안입죠.’ ‘몇 푼이나 들어왔어요?’ ‘겨우 이백여 푼밖에 안 됩죠.’ ‘저런, 늙어 죽겠구먼. 종일 나무아미타불을 외쳐대 사흘 동안에 고작 이백 푼이라니. 우리 집은 부자이고 아이들도 많다네. 진작부터 부처님을 위해 한 가지 아름다운 일을 하려고 하였다네. 스님 오늘 복을 만났어. 내 무엇으로 시주할까?’

그러다가 이홍이 생각이 잠겼다가 이윽고 물었다. ‘유기(鍮器)가 있는데 쓰임이 있을까?’ ‘유기로 불상을 지으면 그보다 더 큰 공덕이 없습죠.’ ‘그래! 나를 따라오게.’

이홍은 앞장서서 남대문으로 들어갔다. 등불이 비치는 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스님, 좀 쉬어 가세.’ 술어미가 술을 데우고 푸짐한 안주를 내놓았다. 이홍은 거푸 십여 잔을 비우고 나서 비단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늘 나오면서 술값을 잊고 왔네. 스님, 우선 자네 바랑 속의 것을 좀 빌리세. 가서 곧 갚음세.’ 중이 술값을 치렀다.

그리고 나와서 길을 가다가 중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스님, 따라오는가?’ ‘예예, 따라가고 말굽쇼.’ ‘유기가 오래된 물건이야. 사람들이 혹 막을지 몰라. 잘 가져야가야 할걸.’ ‘주시는 건 시주님께 달렸고 가져가는 건 중에게 있습죠. 그것도 잘 못하겠습니까?’ ‘그래야지.’

이홍은 다시 또 술집으로 들어가서 중의 돈으로 술을 마셨다. 서너 차례 술집을 들락거리는 동안에 중은 돈을 홀랑 털리고 말았다.

걷다가 또 중을 불렀다. ‘스님, 사람이란 무슨 일에나 눈치가 있어야 하는 법일세.’ ‘소승은 이와 같이 한평생을 보낸 사람이죠. 남은 거라곤 눈치밖에 없습죠.’ ‘그래야지.’

다시 몇 걸음 옮기다가 머리를 돌리고 중에게 말했다. ‘스님, 유기가 원체 커. 무슨 힘으로 가져가려나?’ ‘크면 클수록 좋지요. 주시기만 한다면 만근이라도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그래야지.’

이때 이미 대광통교를 건너가고 있었다. 이홍은 동쪽 거리로 돌아서면서 부채를 들어 종각 속의 인정종을 가리켰다. ‘스님, 유기가 저기 있어. 잘 가져가야 하네.’

중은 이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발딱 몸을 돌이키더니 남산을 바라보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달음질쳐 사라졌다. 그러자 이홍은 어슬렁어슬렁 철전 다리 쪽을 향하여 걸어갔다.

이홍의 생애는 대개 이러하였다. 이는 그의 가장 유명한 일화들만 들어본 것이다. 그는 사람을 잘 속이는 것으로 이름이 났거니와, 이 때문에 나라의 벌을 받아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한다.

외사씨(外史氏: 이옥)는 말한다. 큰 사기는 천하를 속이고 그 다음은 임금이나 정승을 속이고, 또 그 다음은 백성을 속인다. 이홍 같은 속임수는 질이 썩 나쁜 것이니 시비할 것까지도 없다. 그런데 천하를 속이는 자는 천하의 임금이 되며, 그 다음은 자기 몸을 영화롭게 하며, 그 다음은 집을 윤택하게 한다. 이홍 같은 자는 속임수로 마침내 법에 걸려들었으니, 이는 남을 속인 것이 아니고 실은 자신을 속인 셈이니 또한 슬픈 일이다.” 이옥, ‘이홍전(李泓傳)’-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